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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여자’라는 이중의 굴레에 씌워진 탈북여성들의 ‘국적없는 삶’
운영자 2015-04-24 추천 0 댓글 0 조회 169901

탈북자 인권은 곧 탈북 ‘여성’ 인권이다. 북한 이탈주민 가운데 여성의 비율이 70%를 넘기 때문이다. 탈북 여성이 남성보다 2~3배나 더 많은 이유는 북한의 경제난, 그리고 전근대적 사회분위기와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 1990년대 ‘고난의 행군’ 이후 세대주(남성 가장) 중심의 배급이 끊기면서 여성들은 북한 내 주요 경제활동 인구로 부상했다. 여전히 남성 중심적인 가부장적 질서가 유지되고 있는 북한에서 장사는 천한 일로 취급받아 남성들은 장마당에 나와 돈을 버는 일을 꺼려 왔다. 그러는 사이 여성들은 장사를 하면서 가정의 생계를 책임지는 실질적 가장이 됐다. 여성들은 또 돈을 벌기 위해 중국에 나왔다가 탈북하는 경우가 늘었다. 북한인권정보센터에 따르면 현재 중국에 거주하는 북한 여성들은 약 1만5000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됐다.

경향신문 취재팀이 중국 거주 북 여성주민들을 직접 만나본 결과 북한에서는 여성에 대한 폭력과 착취가 문제라는 인식이 거의 없었다. 여성들이 중노동과 가정폭력이라는 이중 고통에 노출돼온 이유다. 국경을 넘는 과정에서 자발적으로든 비자발적으로든 중국 남성에게 팔리는 일이 자행됐으며, 중국의 2등시민으로 전락해 밑바닥 노동을 하며 살고 있었다. 불법 경제 이민자로 ‘국적없는 삶’을 사는 북한 여성들의 인권침해 실태를 구술생애사적 방법을 통해 들어봤다.

■ 박정숙 (가명·42세)
남편 죽고 중국으로 도강
성관계 요구에 보모일 관둬

지난해 겨울, 열세살 딸의 손을 잡고 꽁꽁 언 두만강을 건넜다. 중산층이었던 우리 가정은 2006년 남편이 교통사고로 죽고 나서 빈곤층으로 추락했다. 남편이 없으니까 당장 국가배급이 끊겼다. 남편 대신 국가가 정해준 기업소에 나가 일해야 했지만 몸이 아파 국가일을 하지 않고 술장사를 하게 됐다.

결혼생활은 끔찍했다. 중매로 만난 남편은 결혼 4개월 후부터 바람을 피우기 시작했다. 첫번째 여자 때, 낌새를 채고 추궁하니 사과를 했다. 그러나 한달이 안 되어서 다시 내 눈에 띄었을 때 남편은 화를 내는 나에게 오히려 욕을 하며 때리기 시작했다. 나를 뒷마당으로 끌고가 비닐장화로 얼굴을 때리고 발로 몸을 걷어찼다. 이혼하려 했지만 친정에서는 “딸이 시집갔다 돌아오면 집안망신”이라며 결사코 반대했다. 남편은 죽은 후 빚만 남겼다. 남편이 죽고, 11월부터 2월까지 1년분 나무(땔감)를 혼자 다 하느라 팔이 병신이 됐다.

중국으로 도강한 후 지난 4월부터 해온 보모(노인 돌보미) 일을 4개월 만에 그만 두었다. 60대 중국 노부부를 돌봐주는 일을 했는데 할아버지가 나에게 성적 관계를 요구했기 때문이다. 중국 시삼촌 집에 얹혀 살고 있는 딸에게 생활비를 보내기 위해 빨리 일자리를 구해야 하는데 큰일이다. 불법 신분이니 최대한 눈에 띄지 않는 일을 해야 한다.

■ 이명자 (가명·75세)
노인들 수발하며 돈 벌어
살려면 죽을때까지 일해야
중국에서 7년째 불법 체류 중이다. 2005년, 돈 벌 작정으로 홀로 도강했다. 예순여덟이었다. 죽기 아니면 살기였다. 김정일 장군 시대부터 배급이 다 끊기니까 살지를 못하겠더라. 이곳에서 중국 노인네들 수발하는 일을 하며 북에 있는 자식들에게 돈을 부쳐주고 있다.

북한에서 나올 때는 장사를 할 요량이었다. 당시 북한에서 10% 이자로 50만원을 꿔가지고 나왔다. 그런데 말도 안 통해 장사는 못하겠더라. 돈은 아직도 계속 갚고 있다.

주위에서는 나도 이제 자식들에게 수발받을 나이라고 하는데, 북한은 다르다. 북한 여자들은 죽을 때까지 자식을 위해 돈 번다. 보모로 한달에 2000원(위안) 버는데 자식들(1남 3녀)에게 1300~1500원(위안) 보내주고 있다. 큰 아들이 쉰인데 아직도 배를 타고 있다. 마음이 아프다. 내가 고생하는 덕에 자식들 형편이 그래도 조금 나아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작년에는 돌보던 중국 할마이가 죽어 혼자 장례를 직접 치러주기도 했다. 나보다 10살 많은 할마이였다. 중국은 아들, 딸, 며느리들이 도시로 다 돈벌러 가 부모를 모시지 않는다. 그때 할마이 자식들이 나에게 수고했다고 200원(위안)을 주더라. 북한 여자는 생활력이 강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 장마당 가보면 남자는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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